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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49호] 신발색깔 - 08 김상래

처음에는 잘 몰랐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색깔과 눈앞에 놓여있는 종이의 색깔, 그리고 신발의 색깔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

세상에는 32색 크레파스로는 그려낼 수 없는 색깔이 많다는 것.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녹색만을 칠해서는 눈앞의 산을 그릴 수 없고,

살구색만을 가지고는 친구들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흰색 운동화는 흰색의 눈을 밟을 때만큼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신발을 끔찍히 아끼는 내 흰색 운동화는,

너무나도 깨끗한 그곳의 흰색 눈과 비슷한 색을 띄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동생의 60색 색연필을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게 되었다.

더 많은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또 다시 더 많은 색의 색연필을 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기에,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색의 색연필을 보고도 설레지 않고,

새로운 색의 볼펜을 모으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색은 조금씩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산은 녹색의 것이고, 단풍은 빨갛고 노란색일 뿐이고, 하늘은 하늘색이나 파란색 말고는 다른 색을 띄는지는 잘 모르게 되었다.

언젠가 바보처럼 하늘은 보라색이라고 말하게 했던,

그 고등학교 시절의 보라색 하늘의 사진을 잃어버리고,

저녁의 붉은 노을과 새벽녘의 가슴시린 흰색의 하늘,

그리고 한밤중의 단단한 어두움과 별빛으로 수놓인 하늘을 잃어버렸기에, 하늘의 색은 조금씩 단순해진 것일까.

내 운동화는 언제까지고 흰색이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언제까지고 흰색이라고 믿었다.

 

"오빠, 서울은 눈이 좀 까맣네?"

시험준비로 여념이 없는 동생의 말을 한귀로 흘려버렸다.

 

"더러운가부지."

동생은 오늘도 60색의 색연필로 세상을 그려내고 있지만,

나는 세상을 60색의 색연필로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휴학을 신청했다.

그리고 난 시골로 내려와, 친구들을 만나고, 뛰고, 숨쉬었다.

전화를 할 때는 내가 변한 것 같다고 걱정하던 친구들은,

나를 만나고서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안도했지만,

나는 그들을 만나고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내 자신에 안도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흰색의 눈, 그리고 흰색의 내 신발.

하지만 더 이상 내 신발은 그 눈 속에 숨지 못했다.

그래, 서울의 눈은 좀 까만색이었고,

내 신발도 까만색으로 얼룩이 지고 있었던 거다.

동생은 오늘도 60색의 색연필로 세상의 색들을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나는 이제서야 세상을 60색의 색연필으로만 말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