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공간에 엮여있다.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다. 담벼락에도 있고, 흙길에도 있고, 건물에도 있고, 길 가다 보이는 나무에도 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 문득 기억이 묶인 곳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영화 스크린처럼 그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런 특별한 기억이 묶인 공간이 하나씩 모인 지도가 있다. 만약 나에게 상상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세상에 보인 적 없는 형태의 지도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손으로 확대/축소할 수 있는 평범한 위성 지도 같았다가 쿼터뷰 게임처럼 비스듬히 내려다보이기도 하고 1인칭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주변 물체의 색깔은 제멋대로이며 모양도 참 제각각, 일정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왜곡된 만큼 떠올리는 공간의 모습도 상당히 어그러져 있다.
대여섯 살 이전의 나의 공간은 이 지도에 거의 보이지 않거나 있어도 심히 왜곡된 상태로 존재한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대여섯 살 무렵 이전의 기억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글을 잘 쓸 때가 아니라 기록해둔 게 있을 리 만무하고, 사진을 봐도 사진 속의 장면이 보일 뿐 연상되는 기억이 없다. 뭐, 보통 사람들은 다들 어릴 때 기억을 잊어버리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여행을 가서 두 살 때 기억을 떠올린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기억은 아니고 어떠한 장면을 떠올렸다. 다산초당 앞에 나무를 보고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정확하고 선명한 기억은 아니었다. 눈앞에 보고 있는 초당 건물과 비슷한 점은 거의 없었고 색도 내가 알고 있는 RGB 코드로 나타낼 수 없을 것 같은 심히 난해한 장면이었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놀라셔서 초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계속 장소와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다른 기억은 없는데 왜 이 장소에 대한 기억만 있는지, 그동안 알지 못하다가 무엇을 보고 깨닫게 되었는지. 기억에 남은 장면은 왜 그렇게 왜곡되는지, 우리는 왜 어릴 때 기억을 잊어버리고 사는지 등등에 대해.
심리학책에서 왜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지에 대해 읽게 되었다. 바우어는 기억의 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때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곧잘 기억하곤 하는데, 성인이 되면 그때 기억을 좀처럼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해 우리의 기억력을 발달시킨 결과입니다. 어찌 보면 역설이죠.” 태어난 뒤 뇌가 기본적인 조직을 갖추고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기억을 만들어 저장하는 역할을 맡은 뇌 또한 성장한다. 해마는 장기 기억에 관여하고, 해마의 발달과 관련된 신경조직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불행히도 그 불완전한 기간에 겪었던 일들은 가장 잘 잊히는 것이 되어 제일 먼저 사라진다.
기억에 망각에 대한 몇몇 주장들이 있지만, 사실 이 설명을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근거는 아직 거의 없다. 문득 여섯 살 이전의 내가 기억하는 장소는 또 어디가 있을지, 기억은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장소를 여러 곳 찾으면 기억의 망각이나 왜곡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서울과 그 주변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앞 덕수궁 길, 광화문 사거리 우체국 건물, 낙산공원 입구 벽화(벽화 그림은 자주 바뀐 것으로 안다), 성곽길 아래 부암동 계열사(치킨보다 골뱅이소면을 잘 먹었다), 하늘 공원 올라가는 길 사이 개울물, 도롱뇽을 처음 봤던 백사실 계곡... 차가 없어서 아직 멀리 못 가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사실 기억이 엮인 공간을 찾겠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이곳저곳 많이 걸어 다녔다. 마스크 꼭 끼고.
기억하는 장면에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다 보인다. 3인칭 시점이다. 기억하는 물체 주변으로 블러가 씌워진 장면도 있고, 나보다 주변이 선명한 장면도 있다. 도롱뇽이 나보다 크게 보일 때도 있고, 나무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기도 한다. 색상도 각양각색이다. 해가 질 무렵이라고 기억하는데 떠오르는 하늘색은 맑은 분홍빛이기도 하다. 난 공간에서 보낸 무수한 시간 중 단 하나의 순간을 기억하였고, 그 이후부터는 나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아는 것만 기억할 것인가? 인식한 것만 남길 것인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이었을까? 이 선택들에 따라 내 기억에 남은 도롱뇽은 크게 보이고 인식의 대상이 아니었던 배경은 블러 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순간이 첫 번째 왜곡의 시작이다. 그리고 다음 왜곡은 외부요인으로부터 진행된다. 심리학자 로프터스 교수는 우리의 기억이 포착하기 힘든 미묘한 힌트에도 쉽게 오염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서 기억을 왜곡하거나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보이게끔 3인칭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 찍힌 사진을 보았기 때문에 그 사진이 기억과 섞였을 거로 추정한다. 하늘빛이 분홍색인 장면 또한 알 수 없는 미묘한 힌트가 있었음이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건도 섞여 순간의 장면은 더 일그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 시점의 내가 기억을 또 한 번 왜곡하고 있다.
기억을 만들어 저장하는 역할을 맡은 뇌가 완전히 성장한 이후부터는 내가 어디를 집중해서 보는지 기억의 순간에서 무엇을 인식하는지 파악할 수가 있다. 가령 롱보드에 관심이 많았던 중학생 때, 가을날 월드컵 공원에서 보드 타는 사람이 제일 잘 보이는 것처럼 당시 관심사, 흥미 등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물론 중간중간 왜곡되는 포인트가 전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맥락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가 있다. 궁금한 것은 그런 개연성이 없는 여섯 살 이전이다. 불완전한 뇌를 가지고 있던 당시 나는 기억 저장의 순간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시행착오는 어떤 기준으로 발생했을까? 제일 처음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부터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침대, 모빌 등으로부터 우선순위를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주변에서만 요인을 찾으려고 했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어린아이들의 뇌에 ‘그것’이 공존한다는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이 에피소드는 나에게 여섯 살 이전의 기억 저장과 왜곡에 대한 특별한 가설을 제시했다. 뇌를 해석해서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분석하던 한 연구소에서 아기들의 울음소리에서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를 꾸준히 발견한다. 오류인 줄 알았던 그 생각의 정체는 류드밀라 행성에서 온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수만 년 전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어떤 이질적인 존재들이고, 외부접촉을 통해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들어간다. 우리들과 함께하며 지성과 철학을 가르치다 언어를 습득하기 시작하는 일곱 살을 전후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유년 시절의 기억과 함께 우리를 떠난다.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고민에 대한 너무나 신박하고도 명쾌하게 답을 주어 나는 이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 기억의 왜곡과 망각에 우리가 모르는 제3의 존재를 끌어들여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럼 여섯 살 이전 나에게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의 우선순위를 판단할 수 있었고, ‘그들’이 기억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지우개로 지운 듯 이전의 기억이 깔끔하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지금껏 공간에 대한 나의 기억이 외부요인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릴 수는 있으나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만약 내가 기억하는 그 많은 순간이 내가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그것을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그들’은 자신들이 영향을 미친 기억들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닐까.
공간에 엮인 기억에서부터 참 멀리 왔다. 책 얘기를 꺼내려고 시작한 글인데, 쓰다 보니 길어졌다. 사실 기억이 왜곡되던, 비틀어지던, 사라지던 그것이 나에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와 왜곡된 기억이 나의 공간에 엮였다. 그리고 그 공간을 배경 삼아 내가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혹자는 이 왜곡된 기억들의 합인 ‘나’를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글쎄.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기억이 변화하고 있는지, 나의 어떤 감정이나 의지가 작동하는지 알면 왜곡된 기억이어도 온전한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장면이라도 지금 떠올리면 지금의 감정이 지배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기억은 저장된 시점에 느낀 감정보다 꺼내는 시점이 감정과 의지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 감정대로 기억 속의 공간이, 이야기가 왜곡된다. 자꾸 내 기억이 같은 감정으로 귀결되거나 장면이 구겨지거나 공간이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면 지금 나의 기분이 어떤지, 무엇이 기억을 어그러뜨리는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다. 나의 상태나 기분이 어떤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장은 표현 능력이 아쉬워 보여주기는 어렵지만 내가 기억하는 수많은 공간을 다양한 특별한 감정으로 잘 놔두면 언젠가 그림으로든 표현할 수 있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이것도 혹시 류드밀라에서 온 ‘그들’이 실수로 남기고 간 것 중 하나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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