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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59호]「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를 읽고 - 20 김재민

- 결국 도시계획은 ‘사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에 귀결 -

    처음 책을 다 읽었을 때, ‘서울은 도시가 아니라는자극적인 제목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효과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었음을 가장 먼저 느꼈다. 저자는 서울에 만연한 괴리를 다각적으로 지적한다. 사람들을 위한 인도에는 자동차들이 침범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사적인 행위가 추구되고, 추억을 머금은 건물들은 자본의 논리로 일회용품처럼 지어지고 철거된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반도시적, 혹은 전근대적인 인식에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도시가 도시다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되려 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을 도시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괴리를 인식하기 위해선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있어야 현상이 그것을 벗어나는지와, 어느 정도 벗어났는지 그 정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9개의 챕터를 걸쳐 서울에 존재하는 여러 괴리를 지적하나, 명시적으로 그 괴리의 인식 기준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걸을 수 있는 도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공유할 수 있는 도시, 그리고 지속 가능한 장소로서의 도시라는 세 가지 범주로 체계화할 수 있었다. 곧이어 세 가지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오직 사람만이 그 괴리를 인식하도록 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모인 것 자체를 도시라고 부를 수는 없으나 도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모여야만 한다. 제아무리 기술적으로, 혹은 미관상으로 완벽한 계획을 바탕으로 지어진 도시가 있다고 한들, 주민들에게 삶의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면 이를 좋은 도시라고 볼 수 없다. 사람이 없는 도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도시는 곧 사람이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기회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회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본다면 비로소 도시계획의 본질이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걷기 좋은 도시에는 쾌적함과 활기로 여유를 즐기고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걷기야말로 가장사람의 척도에 맞는 행위로써 자가용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사람들에게 제공해준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공유할 수 있는 도시에는 여러 사람들이 상호작용하여 시너지를 내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시너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시너지로써 발전하는 것은 사람들의 역량이다. 지속 가능한 장소로서의 도시에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추억과 혁신이 공존하는 바람직한 미래를 그려나갈 기회가 있다. 추억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된 기억이며, 혁신 역시 사람들의 삶을 더욱 편하게 만들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주체 역시 사람이다.

    이 책은 서울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도시계획의 본질이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가 점령한 도로 속에서 사람들은 걷기라는 선택지를 박탈당한다. 방음벽은 사람들 사이의 단절을 일으키고, 방 문화는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방해한다. 새집증후군은 새집 밝힘증에 걸린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남향 아파트는 사람들의 공유공간을 희생시킨다. 모델하우스와 루체비스타는 사람들을 환상 속에 가두어 서울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도록 하는 동력을 상실시킨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들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어긋나는 것으로 문제가 시작된다. 따라서 서울을 이상적인 기회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시계획의 기준으로써 사람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 ‘사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 위해선 맥락에 대한 존중도 어느 정도 필요 -

    만일 도시계획의 기준이자 본질은 사람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이 담고 있는 가장 정제된 교훈이라고 본다면, 그러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은 역설적으로 한계를 지니게 된다. 이는 이 책이 마주했을 가장 강력한 비판들과 연관이 있다. 저자는 책에서 서울의 다양한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것들이 속히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인지 그 여부 자체를 놓고도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줄지어 늘어선 서울의 판상형 남향 아파트는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최악의 건축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통적 건축과 현대적 건축을 접목한 혁신이자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문제제기가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지는 독자들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저자는 그 문제들이 서울이 지닌 도시라는 지위를 위협할 만큼 심각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저자는 뉴욕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전 챕터에 걸쳐 서울과 대비되는 뉴욕의 모습을 예찬한다. 뉴욕이 분명 살기 좋은 도시의 한 모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살기 좋은 도시는 꼭 뉴욕의 모습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축선만을 놓고 보았을 때 신촌의 거리보단 가로수길의 거리가 더 좋은 거리 요건에 부합하지만, 일직선의 건축선을 위해 신촌의 모든 건축물들을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사실과 같은 이치이다. 저자의 예찬은 뉴욕이 유일한 정답의 도시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허나, 도시계획 분야에서는 이상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도시는 저마다의 강점이 있으며, 서울 역시 다양한 매력을 가진 도시이다. 과연 뉴욕이 서울보다 객관적으로 더 살기 좋은 도시라고 어떠한 의심 없이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은 각자 도시로부터 기대하는 가치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선호를 일률적으로 측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저자처럼 쉽게 상호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뉴욕의 거리를 부러워하는 서울시민이 있을 수 있듯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과 발전된 유비쿼터스 환경이 조성된 서울의 디지털 인프라를 부러워하는 뉴욕시민 역시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치안 역시 서울의 주요한 강점 중 하나이다. 영국의 저명한 주간지에서 세계적인 도시들의 안전도를 평가해 순위를 매긴 자료에 의하면, Personal Security 부문에서 15위를 차지한 서울은 30위인 뉴욕보다 무려 15계단이나 높은 안전한 도시이다. 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가치인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이라면, 뉴욕보다 서울이 훨씬 더 살기 좋은 도시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장 서울에 사는 우리는 카페에서 자리를 맡기 위해 테이블에 물건을 놓은 채 자리를 뜨지만, 이러한 행위는 뉴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어리석은 행위이다.

    서울과 뉴욕의 우열을 가릴 수 없듯, 도시 속 어떠한 현상을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증거가 필요하다. 만일 도시문제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문제를 규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많은 자료, 심지어는 일정 수준의 사회적 합의를 요구한다면, 도시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폐단을 해결하기 어려워지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저자는 문제를 제기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생략한 채, 일종의 가정을 세워 그것들을 문제로 간주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설득력을 잃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지닌 가장 중요한 메시지 도시계획은 사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에 반할 여지가 있다. 각 도시가 지닌 통시적인 맥락을 배제한 채, 도시 별 공시적인 모습습. , 결코 대표될 수 없는 일부에만 치중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각 거리, 더 나아가 도시마다 지니는 고유한 맥락이다. 각 도시가 지니는 맥락은 그 자체로 그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자발적인 합의로써 완성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부터 도출된 맥락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마다 지닌 배경을 배제한 채로 철저히 중립적인 시각에서 우열을 가리는 데에만 치중하고 그에 따른 일률적인 계획을 수립한다면,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로써 작용하는 도시에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사회마다 구성원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택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미국의 면적은 약 98,3151, 인구 당 면적이 자그마치 약 2,892ha에 달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넓은 필지에 건식 공법을 바탕으로 한 단독주택을 짓고 스스로 집을 보수하고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면적은 약 1,004로써 인구 당 면적은 미국보다 10배 정도 적은 약 200ha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 수십 년간 애용해왔던 습식 공법의 노하우를 모두 무시한 채 모든 건축을 건식 공법으로 전환한다면 외곽 난개발, 건설경기 위축 등 전례가 없던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 효과적인 문제 제기를 위해서는 각 사회의 이상향에 대한 존중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사람이 구축한 맥락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 수만 명의 독자의 수만 가지 해결책을 떠올리도록 장을 마련한 저자의 배려 -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어쨌거나 독자들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충분히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문제 제기를 이해할 때 즈음이 되면 이미 책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고 끝이 나게 된다. 전체에 걸쳐 문제를 제시하는 것에만 그쳤을 뿐, 이 책은 서울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화두를 던졌으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독자 스스로 찾아가길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 제기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킬 것을 예상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것은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책을 읽은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얽힐대로 얽혀버린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참여를 기반으로 한 상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여느 분야와 다를 바 없이, 도시계획 분야에 있어서도 비범한 누군가가 총대를 매서 패러다임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해나간 사례들은 존재한다. 프랑스의 오스만은 파리의 가로망을 설계하고 기반시설을 확충해 파리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우리나라에서는 특유의 뛰어난 추진력을 바탕으로 세운상가, 여의도 등 굵직한 사업들을 진행한 불도저 시장김현옥 시장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전형적인 하향식 접근방식으로써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 오스만은 공공예산의 낭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임했고, 김현옥 시장은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임했다. 결국, 특정 소수에 의해 추진되고 집행되는 도시계획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다른 분야에 비해서 도시계획 분야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시민의 여론이나 참여도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기적으로 충족시켰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의 필요나 선호는 지속적으로 변하므로 지속적인 피드백과 모니터링 역시 필수적이다. 이러한 환류 과정은 하향적 접근에서 잘 작동하기 어렵다.

    어떠한 것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해야 하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불편을 느껴야 한다. 문헌상으로만 다른 도시의 사례와 서울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변화의 동력은 도시의 주인인 시민들이 직접 느끼고 감상을 공유하며 기존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확인하는 차이로부터 오는 자발적 참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를 개발할 때, 기존의 도시 속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훌륭하다는 평가가 나온다면 이는 곧 다른 도시까지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고, 실패적이라고 한들, 경직되어 도태되는 도시에선 있을 수 없는 혁신의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선순환은 서울을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