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에서 말하는 잠실은 좁은 의미의 잠실, 즉 잠실역 일대를 말한다는 것을 밝힌다. 또한 글에 실린 사진들은 글쓴이가 현장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이다.
잠실은 갯벌 같은 곳이다. 갯벌은 대충 보면 흑색 개흙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을 잘 살펴보면 엉금엉금 기어가는 소라게나 바위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굴들이 보인다. 잠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잠실은 대충 보면 왕복 12차선도로를 꽉 메운 쥐색의 자동차들 속으로 삐죽 튀어나온 돌 같은 건물들, 석촌호수라는 약간의 물웅덩이가 전부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놀이공원이라는 독특한 전경을 가진 롯데월드가 있고, 러버덕과 판다, 스누피 등 여러 설치미술로 한창 ‘핫’한 잠실이 숨어 있다.
갯벌에서 가장 중요한 생물은 갯지렁이라고 한다. 갯지렁이가 뚫어 놓은 갯벌 속 가느다란 통로들은 산소를 머금은 바닷물이 지나다니는 길이 되어 갯벌 깊이 사는 생물들도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실에도 갯지렁이가 뚫은 통로와 같은 역할의 지하공간이 있다. 넓고 복잡한 차도로 인해 조각난 잠실의 공간 사이의 단절을 해소해주는 땅 속 통로인 지하네트워크가 존재하는 것이다.
며칠 전 타 지역에 사는 친구와 잠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잠실 지상에서 만난 그 친구와 잠실역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이 다 여기 있었구나!” 지상에서 봤을 때는 잠실의 유명한 정도에 비해 사람이 많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지하로 내려오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이 보여 놀랐다는 것이다. 잠실에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 나에게는 익숙한 모습이 알고 보면 잠실만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타 지역 사람의 잠실에 대한 소감은 나에게 ‘왜 잠실에서는 사람들이 지상보다 지하에서 더 많이 활동하는지’, ‘잠실역 지하는 잠실에 어떠한 의미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잠실역사거리
그렇다면, 왜 잠실은 사람들이 지상보다 지하에 더 많을까? 이 질문에 나는 1학기 때의 도시학개론 수업을 생각했다. 도시학개론 수업에서 ‘횡단보도가 없는 넓은 차도는 차도로 인해 나뉜 두 공간 사이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예시로 잠실역부터 송파구청 방향으로 나 있는 왕복 12차선 도로를 들어 주셨는데, 나는 이것이 잠실역 주변은 사람들보다 자동차들에 초점이 맞추어진 곳이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잠실역 주변의 차도는 송파구청, 잠실대교, 롯데월드 중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모두 12차선의 도로이다. 보도는 좁은 편은 아니지만 교통량이 많아서 걷기에 시끄럽고, 교통체증으로 배가 된 매연을 마시며 걸어야 하며, 횡단보도는 넓은 것들이 드문드문 있어 차도 반대편으로 건너가려면 잠실역 입구로 들어가 지하보도로 건너는 것이 편하다. 요즘에는 잠실에서 진행되는 여러 공사들 때문에 그나마 있던 보도마저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아마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지상보다는 지하로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잠실 주변 차도
그렇다면 사람들은 지상의 불편함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지하를 이용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니, 지하의 편리함을 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하를 택했다고 생각한다. 잠실역은 여느 환승역들과 비슷하게 출구는 11개이지만 잠실역 주변의 거의 모든 건물들을 이어주기 때문에 실질적인 출구가 셀 수 없이 많다. 무엇보다도 잠실역 주변에 사람들이 방문할 만한 거의 모든 곳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하에 한 번 들어가면 굳이 지상에 나가지 않아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잠실의 지하는 역을 중심으로 한 쪽에는 지하상가가 있고, 지하상가 반대편으로 롯데백화점 앞 지하광장(트레비분수 광장)이 크게 있다. 이 지하광장에서 잠실역을 등지고 바라보면 각각 롯데월드몰, 백화점, 롯데월드 및 마트로 갈 수 있는 세 갈래 길이 있다. 반대편 지하상가 방향으로 향하면 여러 상점들과 교보문고, 음식점들이 있는 주상복합 롯데캐슬프라자로 이어진다. 잠실역 사거리의 네 모서리 중 잠실주공아파트5단지가 있는 한 모서리를 제외한 세 모서리가 광활한 지하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는 셈이다.
광장 세 갈래 길
광장 앞 사람들
한편, 롯데월드와 마트로 향하는 길은 꽤 긴 탓에 양쪽으로 옷가게와 카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이 길은 롯데월드와 마트의 일부로 롯데(기업)에서 사람들의 이동경로에 상점으로 즐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조성한 것 같은데, 놀랍게도 잠실역에서부터 광장 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억지스러움이나 위화감이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리하고 있는 길들이나 잠실역 지하상가를 방문하기 위해, 잠실역 지하에 방문하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지하로 향하게 된다. 잠실역 지하에 상가들이 많이 형성된 계기를 물었을 때, 유동인구가 많아진 것이 먼저인지 지하상가가 형성된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잠실의 지하는 위에서 서술한 상가들로 인해 소비생활의 장소가 되고, 트레비분수 광장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사인회가 열리는 등 문화생활의 거점이 되기도 하면서 잠실역 지하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장소가 되고 있다.
잠실의 지상은 고층건물들의 향연으로 신촌 연세로처럼 각 건물들의 1층을 차지한 상점들을 찾기 어려운데, 지하는 상점과 사람들 및 다양한 행사의 중심지로써 복작거리는 잠실역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더 나아가서 잠실역 주변의 건물들 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지상에서는 12차선도로로 단절되었던 공간을 잇는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잠실역 지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였다. 우선, 잠실을 찾는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상보다는 지하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하네트워크는 잠실 일대의 공간의 단절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 준다. 지상은 사람들에게 매우 불친절할지 모르지만, 잠실이 소통하는 방법은 지하에 있다는 것. 그것이 잠실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잠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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