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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53호] 디지털 시민: 연결로부터의 외로움 - 17 최원준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중략)  책임질  있는  누구인지 물었다. 너뿐이야.  오롯이 혼자였다.  (중략)  아픈지를 찾으라 했다. 너무  알고 있다.   때문에 아프다. 전부   탓이고 내가 못나서야.”

 

 

 2017 12 18 샤이니의 영원한  종현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의 음악을 즐겨듣던 팬으로서 죽음보다 더욱 안타깝고 충격적이었던 , 위의 종현이 작성한 유서 내용이었다. 유서를 읽고  가지 생각이 들었다.  번째는 상상도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고통의 원인이 외부였다면 회피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쉽게 치유할 수도, 떨쳐낼 수도 없는 지긋지긋한 생채기인 것이다. 다른 것을 탓할 수도 없다. 종현은 이를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번째는 한병철의 <피로 사회>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는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해야 한다 아닌 ‘  있다라는 긍정성이 성과사회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 기술하면서 현대사회의 우울증은 “타자의 부정성 아닌 자기가 만들어낸 피로, “나르시시즘으로 인한 고립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병철은  “고립이라는 키워드를 주로 삼고 있는 우울증을 현대 사회의 주된 질병이라 보았을까? 나는 고립이 사회 구성원  소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현대 사회와 근대 사회 소통의 가장  차이점은 디지털 매체를 통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사회적 고립은 어떤 연관 관계가 있을까? 만약 디지털 매체가 우울한 개인들을 만든다면  세계 인구의 90% 거주하는 도시는 어떻게 대처할  있을까?

 

 디지털 매체는  세계인이 연결될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예전이라면 >)아테네의 승리를 전하기 위해 42.195km 뛰어야 했지만, 지금은 페이스북의  메시지 전송 하나면 수만km 떨어진 세계인들과 즉각적으로 소통하고 연결될  있다. 디지털 매체가 사회 깊숙이 스며들면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있게 되었고, 이는 자신과 동일한 관심사, 취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 간의 연결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이 디지털 매체에 익숙해지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연결되는데도 “나르시시즘으로 인한 고립으로 발생하는 우울증 환자 수는 나날이 증가 중이다. 물론 모든 우울증이 나르시시즘으로 인한 고립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울증이 “결코 자신의 의지로는 회복될  없으며 자연치유  수도 없는 엄연한 질병1)임을 고려할  사회와의 고립은 우울증의 치료에  장애물이다. 만약 디지털 매체가 현대 사회 우울증의 발병과 치료에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있다면, 과거의 의사소통 (구두, 서신, ) 들과는 다른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매체가 실존하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있을까? 유발 하리라는 인간이 상호간의 이야기를 만들며 공통적 이야기를 믿음으로써 사회가 협동하고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성직자-왕과 신을 융합한 살아있는  파라오를 창조했다. 생물학적 파라오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가뭄을 멈추거나 홍수를 조절할 능력이 없고 때가 되면 죽는다. 이집트 사람들은 생물학적 파라오가 아닌  파라오를 믿었다. 그들은 공통된 이야기를 믿으며 파라오를 위해 협동하며 댐과 운하를 만들었고, 이는 이집트 사람들이 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홍수와 가뭄을 조절할  있게 해주었다. 이야기(추상) 현실을 지배하는 순간이다.

 

 이야기들이 축적되고 고도화되는 현대 사회에선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저서 <시뮬라시옹> 에서 이미지가 원본을 압도하며 비판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현상에 대해 지적했다. 미국에서의 BMW 예로 들어 보자. 미국에서 BMW  Black Man Wish 약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류층 흑인의 성공 기준이자 보증 수표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상류층 흑인 John 디트로이트에서 출근하다 옆집 Jamal 새로  BMW 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본다. Jamal 창문을 열고 “ 이게 성공한 Black man 삶을 즐기는 방식이야 “ 라고 인사를 하며  가버린다. John에게 있어 BMW 실질적으로 어떤 엔진을 사용하는지, 내구도는 적합한지, 보증기간이 적당한지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저 성공한 흑인들이라면 BMW 한대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이미지가 상품을 구매하게 한다. 다른 예로 미키마우스를 들어보자. 미키마우스는 쥐를 모델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미키마우스와 쥐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 두발로 서서 사람처럼 걸어 다니는 미키마우스는 사실상 쥐와 별개의 존재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통해 어떤 대상을 모델로 만든 복제물, 가상물이 원본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원본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원본과 복제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사유를 마비시킨다고 비판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예시는 수도 없이 많은데, 대학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가 자신의 실존적인 목숨보다  가치 있어지는 , 사진 편집 앱으로 보정된 자신의 얼굴이 실제 자신의 얼굴이라 생각하는 , 비트코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에서 디지털 매체의 연결은 “실질적인 사람과 사람 간의 유대 아니라 “실제보다  실제 같은 연결에 대한 이미지 제공한다. 유대는 네트워크상에서 만으론 존속할  없다. 네트워크상에서만의 만남은 서로가 서로를 당장 필요로 하기에 임시로 연결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디지털 매체의 특징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과거 의사소통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가장  차이점은 타자성이다. 조선 시대 홍문관 선비 재훈이가 내시 정훈이에게 미팅  잡아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정훈이는 그걸 보고 읽씹했다. 며칠  재훈이가 정훈이에게 가서 서신을 읽었으면 답장하는  도의가 아니냐고 일갈했다. 이렇듯 실재와 실재의 만남에서는  자신도 존엄하지만 상대도 나와 같이 존엄하다는 타자성을 느낀다. 디지털 매체에서 타자는 없어지고  자리를 비대해진 나르시즘이 메꾼다. 가령  번도 만나본  없는 경기도에 사는 재훈이와 강원도에 사시는 정훈이가 있었다 하자.  둘은 게임에서 같은 편이 되었다. 재훈이가 실수를 하자 정훈이는 스스럼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재훈이는 정훈이에게 해를 가할  없기 때문이다.  “타자의 부정성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의 카카오톡은 자신이 원할  읽고 답장할  있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답장을 주고받을  있고 원하지 않는 상대는 차단할  있다. 디지털 매체에서 스마트폰을  사용자나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은 사용자보다 강한 사람은 없다. 디지털 매체는 자기중심적이며 부정성이 최소화  공간이다. 설령 재훈이가 자신의 실수로 게임에서 욕설을 들어 기분이 나쁘면, [차단] 버튼을 눌러 불쾌한 감정을 줄일  있다. Google이나 Youtube같은 웹사이트는 어떠한가?   브라더는 사용자가  동영상, 검색한 기록 등을 취합해 사용자보다 사용자를   안다. 이곳에서도 타자성은 없다. 사용자는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며 나르시시즘의 비만에 걸리게 된다. 기술의 발달로 – 4 산업혁명은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적 세계의 통합을 가정한다. – 현실세계의 것들이 점점 가상세계로 이주해 옴에 따라 가상세계와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부정성을 피해 가상세계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정리하자면 디지털 매체는 나르시시즘으로 가득  있는 우물이다. 사용자는 우물  개구리가 되어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한다. 디지털 매체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사용자는 가장 강하지만 가장 무기력하기도 하다. 무엇을 보아도 자기 자신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2)“···  경우 나르시시즘적으로 변한 리비도는 대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을  없고, 이렇게 리비도의 가동성이 방해받으면 병이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의 누적이 일정 강도를 넘어서게 되면  이상 견딜  없는 것으로 바뀌는  같다.” 우울증은 디지털 매체가 일으키는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의 누적과 궤를 같이한다.

 

 디지털 매체는 또한 인간의 사유력을 크게 약화시키며 의존하게 만든다. Jenny Holzer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라는 말은 인간이 사물, 이미지에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주도권을 빼앗기고 소유 당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을 예시로 들어보자.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가져가야  3가지는?”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 당신이 고른 3가지에 스마트폰이 없는가? 스마트폰이 없는 삶을 상상할  있는가? 대중화된 스마트폰이 출시된  9 만에 일이다.  9 동안 스마트폰은 현실의 기능을 흡수하고 “ 언제 어디서든 자기 마음대로 “ 사용할  있는 스마트폰의 특징과 결합해 사람들을 그것에 의존하게 했다.  이상  구매를 위해 백화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출퇴근시간 인터넷쇼핑몰에서 클릭   하면 상품이  앞까지 배달된다. 길을 잃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지도 앱을 켜면  자세하고 빠른 길을 알려준다. 사랑마저도 스마트폰 안에선 간편하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이 나에게 호감표시를 하면 상대방과 만나면 된다. 현실의 거절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이 최소화돼있다. 스마트폰이 너무 편리하고 빅데이터 기술의 발달로 나보다 나를   알기에, 자신이 처리하고 생각할  있는 부분도 그것에 의존한다. 이로 인해 개개인의 사유력은 축소된다.

 

 u시티란 첨단 정보통신망을 도시의 기본 인프라로 채택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유비쿼터스 서비스가 제공되는 도시를 말한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구  경제 활동 등의 집중에 따른 교통 환경 의료 안전  도시 역기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개념이다. u시티의 기반기술로는 지능형 교통시스템(ITS),  네트워크, 지리정보시스템(GIS), 지능형 빌딩시스템(IBS) 포함된다. 이러한 u 시티는 사물인터넷 기술과 맞닿아 있다. 과거의 의사소통이 사람  사람, 현재의 의사소통이 사람  사물(산업혁명)이었다면, 미래의 의사소통은 사물 간의 의사소통이다. 사물끼리 알아서 도시민의 편의를 봐준다는  무척 편리할  같지만 일순 섬뜩하기도 하다. “집안일은 제가  테니 사회생활에 집중하세요.”라는 기계가 인간한테 하는 조언과 “판매는 인간이  테니 너희 기계는 자동차만 만들어.” 라는 인간이 기계한테 내린 명령이 쌍둥이처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물들 간의 소통은 사용자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고 사유를 포기하며 사물들에 의존하게   있다. “기존 ‘U시티’(유비쿼터스도시) 사업은 기술 발전에 상당 부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도시 실제로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 배제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U시티가 점차 이들과 유리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죠. 이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체감할  있을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 그것이 스마트시티 사업의 출발점입니다.”3)

 

 이러한 디지털 매체의 자기 폭력성에 맞서 도시는 어떻게 대응할  있을까? 사실 디지털 매체와 현대사회의 문제점 – 추상적인 개념과 실재적인  사이의 혼동 -  도시는 일찍이 겪어왔다.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 에서 에버니제 하워드, 르코르뷔지에 등의 모더니스트들을 공격한다. 근대적 계획의 추상적 성격- , 인간의 행위를 기능으로 환원시켜버리는  혹은 공공적 삶의 질적인 차원을 단지 ‘공원, 광장, 가로등의 물리적 공간의 체계로 단순화 시켜버리는   –  실제 삶의 다양한 질적 차원을 소거해 버렸다는 것이다. “철저한 추함이나 무질서보다 훨씬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존재하고 대접받기 위해 분투하는 현실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억누름으로써 이루어지는 허울뿐인 질서의 부정직한 가면이라는 사실을.” 이라 저술한 데서 그녀의 실재를 향한 애정과 열정을 느낄  있다. 그녀가  서게 비판한 자동차 중심 도시계획과 디지털 매체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동차 중심 도시계획은 가로(The street) 배제했다. 가로란 아이들이 이웃 어른들의 시선 아래에서 안전하게 놀이하고 교류하며 자라나는 삶의 공간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타인과 맞닥뜨리며 건전한 자아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한다. 디지털 매체와 자동차 중심 도로는 타자와 머무름이 부재한 공간이다. 난폭운전, 보복운전 행위와 인터넷 폭언과 악플을 다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추상화된 매체 속에서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폭력이다. 또한, 자동차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빠른 속력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풍경에 머무르지 못한다. 인터넷 서핑은 정보의  부분만 빠르게 skimming 하게 하며 생각이 깊게 머물러 고이지 못하게 한다.

 

 미래 도시는 “방황할  있는 도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황은 기본적으로 목표, 목적이 없는 과정의 연속이다.  걸음  걸음 머무르는 과정에서 주위 상황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1 신도시는 주택 공급이라는 뚜렷한 목표 하에 만들어진 도시로, 목표는  달성했으나 주민들에게 방황할 여지를 충분히 주지 못했다. 2004 교통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분당과 일산·중동에 차적을 두고 있는 차량  분당은 전체 차량의 53.1% 서울로 ·퇴근하고 있고 일산(41.2%), 중동(40.4%) 서울 통근 차량이 40% 웃돌았다. 서울을 향한 목적만 있을 뿐이지 도시 내에서의 자급자족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앞으로의 신도시는 굳이 목적을 정하지 않아도 도시 내부를 천천히 거닐  있는, 그러는 과정에서 실재와 실재가 만나는 공간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계는   없는, 인간만이   있는 사색은 머무름에서 온다.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라는 니체의 말에서 머무름의 중요성을 느낄  있다. 4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사람이   있는 일을 대체함에 따라 사유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기계는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짜인 알고리즘대로 처리해 결과를 내놓는다. 하지만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물체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  물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할  있다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리면서 발전해왔다. 도시는 인류의 주된 거주공간이며  사람이 성장하면서 맞닥뜨리는 거주공간은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젊은이를 타락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대신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이를 존경하도록 시키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이 있듯, 미래 도시는 더욱  다채롭고 여유로우며, 비판적으로 사고할  있는 부정성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서울대학교병원, 「우울장애네이버의학정보

[2] 지그문트 프로이트, Neue Folge der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 Frankfurt am Main 1975, p.406.

[3]  김광국,”(일렉트릭4.0) ‘혁신 성장중심에 ‘스마트시티있다”, 전기신문, 18.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