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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51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장강명 작가 인터뷰 후기 - 13 정우민


장강명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은 3년 전이다. 동생이 어느 날 대뜸 도시공학과 선배 중에 장강명 아느냐고 물었다. 인터넷에서 장강명 작가가 쓴 글의 한 토막을 읽었는데 너무 감명 깊었다는 거였다. 새내기였던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표백>의 ‘나’가 요즘 애들은 패기가 없다고 냉소하는 대기업 선배에게 대드는 장면이었다. 글에 별 관심이 없던 동생이었기에 다소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올해 5월이었다. 후배들로부터 장강명 작가님 인터뷰를 제안 받았다. 3년 사이에 선배님은 전업 소설가가 되셨고, 문학상을 두 개나 더 탔다. 사실 문학에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작가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럼에도 이유모를 호기심에 끌려 후배들의 제안을 덥석 받았다.



덥석 받긴 했지만, 인터뷰 할 것을 생각하니 내가 작가님을 뵈어도 작가님에 대해 너무 몰라서 궁금한 게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금은 무식한 방법을 썼다. ‘작가님이 내신 8권의 책을 모두 다 읽자!’ 책을 읽을 때 쉽게 질리는 편이라 읽는 재미가 적으면 책을 잘 읽지 못한다. 내심 8권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클론 프로젝트>까지 모두 빨려들듯 재미있게 읽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단연 <표백>이다. <표백>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책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었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머리가 얼얼했다.

머리가 얼얼했던 건 <표백>의 세연이 쓴 ‘자살 선언’의 도발적인 내용 때문도 있겠지만, <표백>에서 20대를 서술하는 방식이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것과는 달라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표백>의 대기업 선배처럼 요즘 애들은 패기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세대 담론이 출현한 이후 20대는 항상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약자라 규정돼 왔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20대를 위로하는 힐링 자기계발서든, 젊은이들이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던 <88만원 세대>든, 20대를 다루는 방식의 골자는 모두 같다. 모두 ‘20대는 약자’라는 가정하에 이뤄지는 외부의 시선이다. 약자라고 가정해야 힐링해 줄 수 있고 짱돌을 쥐게 할 당위가 생긴다.


20대 관련 출판 서적. 왼쪽부터 ‘88만원 세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20대가 요새 어렵다는 것은 20대 스스로도 잘 안다. 하지만 당사자인 20대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힘들다는 얘기를, 20대도 아닌 사람들이 저마다의 잣대로 20대를 규정하고 그에 맞춰 추동하려는 것으로 보여 조금 마뜩잖았다. 힐링이든 짱돌이든, 그것의 의도가 20대를 위한 언어였다 한들 그것은 진정 20대의 언어가 아니었다.

20대는 스스로의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80~90년대만 해도 20대의 언어로 세상을 분석하는 텍스트가 다양한 형태로 쏟아져 나왔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훨씬 자유롭게 텍스트를 유통할 수 있다. 하지만 20대의 시선으로, 20대의 언어로 쓰인 글은 예전만 못하다. 20대는 스스로의 언어를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당초 성인으로 첫발을 내딛자마자 놓인 상황이 경제위기였기에 생존과 경쟁이 목적인 사회 분위기를 경험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속에서 모든 삶의 목표가 생존이 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20대의 언어에는 내용이 사라지고 흐리멍덩한 자조만 남았다. ‘잉여’,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이런 20대의 풍토가 옳지 못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슬펐을 뿐이다.



<표백>은 40대가 쓴 글이다. 하지만 40대가 쓴 글이라고 거리를 둘 수 없었다. 소설에 나오는 20대 주인공들의 언어가 마치 우리의 언어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0대의 입을 빌려 말한 작품은 <표백> 말고도 많다. 가장 가까이는 <미생>이 있다. 하지만 <미생>의 장그래와 달리 <표백>의 세연은 훨씬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향해 선언한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일을 해낼 수 없는 시대라면 자살하자는 세연의 선언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잠시 미뤄두자. 세연의 선지자적 태도와 도발적인 자살 선언을 던지는 세연의 모습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하나의 카타르시스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했다. 인터뷰에도 나와 있듯, 작가님의 대답은 사실 <표백>의 세연이 쓴 ‘자살 선언’이 진단하는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사라진 사회다. 예전에는 시대정신이던 산업화와 민주화도 가시적으로 이루었다. 성인이 되면 직장을 구해서 내 집과 차를 살 수 있다는, 이전에는 예측 가능했던 미래도 사라졌다. 장기화된 세계 경제 위기는 앞으로의 세상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표백해 버렸다.

<표백>이 나온 것은 2011년이다. 그 이후로도 세대 담론이 지금까지도 변죽만 울린 채 공허한 이유는 세대 담론이 지금 사회의 맹점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20대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세대였기에 다른 세대보다 경제 위기의 충격파를 고스란히 받았다. 그래서 20대가 특별히 힘들어 보이는 것이지, 사실 지금 사회에서 20대의 고민은 20대만의 고민이 아니다. 100세 시대라는데 30~40대는 벌써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50~60대는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이룰 수 있을지 불안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에게 유효한 질문이다.



작가님은 <표백>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20대가 그 답을 스스로 찾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 20대가 그 답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답은 능동적인 20대 혼자서 찾을 수는 없다. 27년 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언했다. 두 개의 축은 30년도 못 가 100년만의 대공황에 비견될 경제위기로 거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분명 이건 20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의 사회가 지속가능한지에 대한 대답을, 그리고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따져 물어야 한다. 물음의 방법은 실의에 빠진 20대를 힐링하는 것도 아니고 20대더러 짱돌을 들라고 추동하는 것도 아니다. 20대를 규정하려 들기에 앞서 선배 세대와 20대가 한데 모여야 한다.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논쟁하며 이 시대의 답을 찾아야 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답이 될 거라 믿는다.

날이 무덥다. 100년만의 폭염이라고도 한다. 예전 같으면 태풍이 두려웠을 텐데 무더운 날이 계속되다 보니 시원한 태풍이라도 바라게 된다. <표백>의 결말 속 ‘나’는 세상을 완번히 바꿔버리는 힘은 없을지 몰라도 몇 번 불어 닥칠 태풍의 에너지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 태풍의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는 오롯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무더운 날씨를 식혀줄 시원한 태풍처럼 우리 세상에 불어 닥칠 태풍을 기대한다. 어쩌면 그 태풍을 만들어 내는 힘도 우리의 손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도 며칠간 수없이 고민했다. 작가님의 작품은 내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 글을 쓰는 것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물인 이 글이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라고 자신하기 어렵다. 명확한 대답이 이렇게 쉽게 나올 것이었다면 진작 해결됐을 문제기도 하다. 그럼에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게 해방감과 즐거움을 주었다. 8월 작가님의 새로운 에세이가 나왔고, 올가을에도 새로운 소설이 나온다고 한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작가님의 작품을 찾게 될 것 같다. 벌써 그가 던질 새로운 질문이 기다려진다.


※ 귀한 시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그리고 제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주신 장강명 작가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